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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테오도어 코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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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밀 테오도어 코허는 스위스의 외과 의사로, 갑상선 수술법을 혁신적으로 개선하여 1909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갑상선 절제술의 사망률을 크게 낮추고, 갑상선 기능 저하증(크레틴병) 연구에 기여했으며, 다양한 외과 수술 기구 및 수술법을 개발했다. 코허법으로 알려진 어깨 관절 탈구 정복술과 코허 겸자를 개발했으며, 뇌진탕, 간질 등 신경외과 분야에도 기여했다. 그의 업적은 수많은 제자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다양한 수술 기법과 증후군, 연구소, 상 등의 명칭으로 그의 이름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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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테오도어 코허
기본 정보
에밀 테오도어 코허의 초상
코허의 초상
이름에밀 테오도어 코허
원어 이름Emil Theodor Kocher
출생1841년 8월 25일
출생지베른, 스위스
사망1917년 7월 27일
국적스위스
서명
직업
직업외과 의사
전문 분야갑상선 수술
알려진 업적갑상선 수술 개발
근무 기관베른 대학교
수상노벨 생리학·의학상 (1909년)

2. 생애

스위스의 수도 베른 출신으로, 유럽 여러 도시에서 의학을 공부한 뒤 1865년 학위를 취득했다. 1872년에는 베른 대학교 외과학 교수 및 외과 병원장이 되었다.

코허는 특히 갑상선 질환 연구와 외과적 치료법 개발에 큰 공헌을 했다. 그가 개발한 갑상선 절제술은 획기적인 방법으로 평가받았으며, 약 5,000건의 수술을 통해 사망률을 0.5%까지 현저히 낮추었다. 이러한 뛰어난 임상 업적을 인정받아 1909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다. 이는 순수한 임상 업적만으로 노벨상을 받은 드문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그는 갑상선 외에도 울혈, 살균 치료, 골수염, 총상 치료 등 다양한 외과 분야 연구에 힘썼으며, 노벨상 수상 후에는 베른에 코허 연구소를 설립하여 연구 활동을 이어갔다.

2. 1. 어린 시절과 교육

에밀 테오도어 코허는 1841년 8월 25일 스위스의 수도 베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철도 기술자였던 야코프 알렉산더 코허(Jakob Alexander Kocher, 1814–1893)였고, 어머니는 독실한 모라비아 형제회 신자였던 마리아 코허(Maria Kocher, 결혼 전 성씨: 베르무트, Wermuth, 1820–1900)였다. 테오도어는 5명의 아들과 1명의 딸 중 둘째 아들이었다. 그는 1841년 9월 16일 현지 베른 대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1845년, 아버지가 에멘탈 지역 엔지니어로 임명되면서 가족은 베른 인근의 부르크도르프, 스위스(Burgdorf)로 이주했고, 코허는 그곳에서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이후 아버지가 베른 주의 수석 엔지니어가 되면서 가족은 다시 베른으로 돌아왔고, 코허는 중학교와 고등학교(Realschule과 Literaturgymnasium)를 다녔다. 그는 학업 성적이 뛰어나 항상 반에서 수석을 차지했다. 고등학교 시절 미술과 고전 고고학 등 여러 분야에 관심을 보였지만, 최종적으로 의학을 공부하기로 결정했다.

1858년 스위스 대학 입학 자격 시험인 마투라를 취득한 후, 코허는 베른 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 그는 안톤 비어머 교수와 헤르만 아스칸 뎀메 교수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학업에 매우 헌신적이었지만, 학생 단체인 스위스 조핑거협회의 회원이기도 했다. 그는 1865년 3월 (일부 자료에서는 1866년[1]), 비어머 교수의 지도 아래 "''크루프성 폐렴의 베라트룸 제제 치료''"에 관한 논문으로 우수한 성적(summa cum laude unamimiterla)을 받으며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865년 봄, 코허는 스승 비어머를 따라 취리히로 가서 유명 외과 의사 테오도어 빌로스를 만났다. 이후 그는 모라비아 형제회의 지원 또는 알려지지 않은 자선가의 후원으로 베를린, 런던, 등 유럽 주요 도시를 여행하며 당대 최고의 외과 의사들을 만났다. 1865년 10월 베를린에서는 베른하르트 폰 랑겐베크 밑에서 공부했고, 루돌프 피르호의 조수 자리를 알아보았으나 얻지는 못했다. 1867년 4월에는 런던으로 건너가 조나단 허친슨, 헨리 톰슨, 존 에릭센 등과 교류했으며, 아이작 베이커 브라운과 토마스 스펜서 웰스의 연구에도 관심을 가졌다. 1867년 7월에는 파리에서 오귀스트 넬라통, 오귀스트 베르네유, 루이 파스퇴르 등을 만났다. 이 여행을 통해 코허는 선진 외과 기술을 습득하고 영어 실력을 향상시키는 등 국제적인 안목을 넓혔다.

유럽 유학을 마치고 베른으로 돌아온 코허는 1867년 10월 대학에서 가르칠 수 있는 자격(venia docendi|베니아 도첸디la, ''가르칠 권리'')을 얻었다. 그는 게오르크 뤼케 교수의 조수로 일하기 시작했다. 1872년 뤼케 교수가 스트라스부르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자, 코허는 그의 후임 자리를 희망했다.[2] 당시 스위스 대학에서는 독일인 교수를 임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에, 교수진은 독일 외과 의사인 프란츠 쾨니히를 추천했다. 그러나 학생, 동료 조수들, 그리고 많은 의사들이 코허의 임용을 강력히 원하며 베른 정부에 청원서를 제출했다. 언론 또한 코허를 지지했으며, 랑겐베크, 빌로스 등 저명한 외국 외과 의사들도 코허를 지지하는 서신을 보냈다. 이러한 강력한 여론의 지지에 힘입어, 베른 정부는 1872년 3월 16일 교수진의 추천과 달리 코허를 베른 대학교 외과 정교수이자 인젤스피탈 대학 병원의 외과 진료소장으로 임명했다.

2. 2. 학문적 경력

스위스의 수도 베른에서 태어난 코허는 모라비아 형제회의 지원을 받아 취리히, 베를린, 런던, 등 여러 도시에서 수학하였다. 1858년 스위스 마투라(대학 입학 자격 시험)를 취득한 후 베른 대학교에서 의학 공부를 시작했으며, 당시 안톤 비어머와 헤르만 아스칸 뎀메 교수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 두 교수가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학업에 열중하면서도 스위스 조핑거협회라는 학생 단체 활동에도 참여했다.

그는 1865년 3월 (다른 자료에서는 1866년[1]) 베른에서 비어머 교수의 지도 아래 '크루프성 폐렴의 베라트룸 제제 치료(Die Behandlung der croupösen Pneumonie mit Veratrum-Präparatende)'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최고 등급(''summa cum laude unamimiter'')으로 받았다.

1865년 봄, 코허는 그의 스승 비어머를 따라 취리히로 갔으며, 그곳에서 병원장이었던 테오도어 빌로스는 코허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 코허는 유럽을 여행하며 당대 가장 유명한 외과 의사들을 만났다. 이 여행 경비는 스위스 로망드 지역의 신원 미상의 여성 후원자(아마도 모라비아 교회 신자)로부터 지원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1865년 10월, 그는 라이프치히를 거쳐 베를린으로 여행을 떠나 베른하르트 폰 랑겐베크의 지도를 받았고, 랑겐베크와 루돌프 피르호의 조수 자리를 지원했으나 자리가 없었다. 1867년 4월 코허는 런던으로 이동하여 조나단 허친슨, 헨리 톰슨, 존 에릭센 등과 교류했다. 또한 난소 절제술의 선구자인 아이작 베이커 브라운과 토마스 스펜서 웰스의 연구에 관심을 가졌으며, 웰스는 코허를 그의 가족과 함께 오페라에 초대하기도 했다. 1867년 7월, 그는 파리로 여행하여 오귀스트 넬라통, 오귀스트 베르네유, 루이 파스퇴르를 만났다. 이 여행을 통해 코허는 선진 외과 기술을 습득하고 인맥을 넓혔으며, 영어 실력도 향상시켜 훗날 영어권의 과학적 발전을 쉽게 따라갈 수 있게 해 주었다.

베른으로 돌아온 코허는 자격 심사를 준비했고, 1867년 10월 12일 교육부에 청원하여 교수 자격(venia docendi; 라틴어로 '가르칠 권리')을 얻었다. 그는 게오르크 뤼케의 조수가 되었으며, 뤼케는 1872년 스트라스부르의 교수가 되기 위해 베른을 떠났다.[2] 코허는 그의 자리를 얻기를 희망했지만, 당시에는 스위스 대학교에 독일인 교수를 임명하는 것이 관례였다. 따라서, 교수진은 코허보다 먼저 프란츠 쾨니히를 뤼케의 후임으로 추천했다. 그러나 학생들과 조수들, 그리고 많은 의사들이 코허를 선호하여 베른 정부에 코허를 선택해 달라는 청원을 시작했다. 또한 언론도 코허를 지지했으며, 베를린의 랑겐베크, 비엔나의 빌로스를 포함한 여러 유명한 외국 외과 의사들이 코허를 지지하는 편지를 썼다. 이러한 여론의 압력에 따라, 베른 정부(''Regierungsrat'')는 1872년 3월 16일, 교수진의 다른 제안에도 불구하고, 코허를 뤼케의 후임으로 외과 정교수이자 인젤스피탈의 대학교 외과 진료소장으로 임명했다.

2. 3. 개인적인 삶

1869년, 코허는 마리 비치-쿠랑(Marie Witschi-Courant, 1841–1921[3] 또는 1850–1925[4])과 결혼했다. 그녀는 상인 요하네스 비치의 딸이었으며, 코허와의 사이에서 세 아들을 두었다. 코허 가족은 처음에는 베른의 마르크트가세에 살았으나, 1875년 빌레트로 더 큰 집으로 이사했다. 이 집은 친구, 동료, 손님들이 자주 모이는 장소가 되었으며, 코허는 자신의 환자들도 빌레트의 식사에 초대하곤 했다.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코허는 독실한 신앙인이었으며, 모라비안 교회 신자였다. 이는 당시 많은 동료 과학자들과는 다른 모습이었는데, 그는 평생 자신의 성공과 실패를 모두 신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특히 과학 분야를 포함하여 사회 전반에 유물론이 확산되는 것을 큰 문제로 여겼고,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 역시 이러한 경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코허는 세 아들의 교육에 직접 관여했으며, 함께 테니스를 치거나 말을 타는 등 시간을 보냈다. 장남인 알베르트(Albert, 1872–1941)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베른의 외과 진료소에서 일하며 외과 부교수가 되었다.

1917년 7월 23일 저녁, 코허는 인젤슈피탈의 응급 환자를 위해 호출되었다. 그는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쳤지만, 이후 몸 상태가 나빠져 자리에 누웠다. 마지막까지 과학 노트를 정리하던 그는 의식을 잃었고, 1917년 7월 27일에 사망했다.

3. 주요 업적

스위스 베른 대학교 외과학 교수이자 외과 병원장으로서 45년간 재직하며, 코허는 응용 외과, 신경외과, 특히 갑상선 외과 및 내분비학 분야에 지대한 공헌을 남겼다. 이 기간 동안 그는 249편의 학술 논문과 저서를 발표하고 수많은 의사를 양성했으며, 베른의 인젤슈피탈 재건을 감독했다.

코허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갑상선의 생리, 병리 및 수술에 대한 연구로, 이는 1909년 노벨 생리학·의학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그는 갑상선 절제술의 안전성을 획기적으로 높였으며, 갑상선 기능 연구에도 중요한 기여를 했다. 이는 순전히 임상 외과 업적만으로 노벨상을 받은 거의 유일한 사례로 평가받는다.

갑상선 연구 외에도 코허는 다양한 외과 분야 발전에 기여했다. 대표적으로 어깨 탈구를 치료하는 코허법 개발, 조지프 리스터의 방부법 도입을 통한 무균 수술 정착, 신경외과 분야의 선구적인 연구, 그리고 지혈에 사용되는 코허 겸자와 같은 수술 기구 개발 등이 있다. 이 외에도 총상 연구, 골수염 치료, 복부 수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

코허는 수술 속도가 빠르기보다는 매우 신중하고 정확하게 수술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의 연구와 저술, 특히 《수술 외과학 교과서》는 20세기 초 외과학 발전에 중요한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노벨상 수상 이후에는 베른에 코허 연구소를 설립하여 연구 활동을 이어갔다.

3. 1. 갑상선 수술의 혁신

코허가 갑상선 수술 연구를 시작했을 당시, 갑상선종 치료를 위한 갑상선 절제술은 매우 위험한 수술로 여겨졌으며, 1872년 기준 사망률이 75%에 달한다는 추정도 있었다. 당시 프랑스 의학 아카데미에서는 이 수술을 금지하기도 했다.

코허는 조지프 리스터의 무균 처리법을 스위스에 도입하고, 출혈을 최소화하는 등 현대적인 수술 기법과 특유의 신중하고 정확한 수술 방식을 갑상선 수술에 적용했다. 이를 통해 갑상선 절제술 사망률을 당시 기준으로도 낮았던 18%에서 1912년까지 0.5% 미만으로 획기적으로 낮추었다. 그는 5000건 이상의 갑상선 절제술을 직접 집도하며 안전한 수술법을 확립했다. 윌리엄 스튜어트 할스테드는 테오도어 빌로스의 수술과 비교하며 코허의 성공 비결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해 여러 해 동안 숙고해 왔으며, 그 설명은 아마도 두 명의 저명한 외과 의사들의 수술 방법에 있을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코허는 깔끔하고 정확하며, 비교적 무혈적인 방식으로 수술을 하여, 캡슐 밖에는 거의 손상을 주지 않으면서 갑상선 전체를 세심하게 제거했다. 빌로스는 더 빠르게 수술했고, 내가 기억하기로는 조직에 대한 배려가 덜했고 출혈에 대한 우려도 적어 부갑상선을 쉽게 제거했거나, 적어도 그들의 혈액 공급을 방해했을 수 있으며, 갑상선 조각을 남겨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코허와 다른 연구자들은 갑상선을 완전히 제거할 경우 갑상선 호르몬 부족으로 크레틴병과 유사한 증상(코허는 이를 '갑상선 절제 후 악액질'(Cachexia strumiprivade)이라 명명)이 발생할 수 있음을 발견했다. 이 현상은 1874년 아우구스트 페체린과 1882년 자크 루이 레베르댕 및 그의 조수 오귀스트 레베르댕에 의해 보고되었다. 코허는 자신의 환자들을 추적 조사하여 갑상선을 완전히 제거했던 경우 신체적, 정신적 기능 저하가 나타남을 확인했다. 역설적이게도 그의 정교한 수술 기술이 갑상선을 거의 완벽하게 제거하게 하여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한 것이다.

이에 코허는 1883년 4월 독일 외과학회 강연 및 같은 해 출판된 논문 ''Ueber Kropfexstirpation und ihre Folgen'' (갑상선 절제술과 그 결과에 대하여)를 통해 갑상선 완전 절제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당시 그의 주장에 대해 갑상선종과 크레틴병은 같은 질병의 다른 단계일 뿐이며 갑상선 제거와 무관하게 발생했을 것이라는 반론도 있었으나, 장기적으로 코허의 관찰은 갑상선의 기능을 이해하고 선천성 크레틴병과의 연관성을 밝히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이는 결국 다양한 갑상선 질환에 대한 갑상선 호르몬 대체 요법 개발의 길을 열었다. (레베르댕 역시 비슷한 시기에 관련 연구 결과를 발표했으나, 코허는 그의 우선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코허는 수술 기법 개선과 더불어 수술 도구 개발에도 힘썼는데, 그가 고안한 끝에 갈고리가 달린 톱니 모양의 '''코허 겸자'''는 오늘날에도 널리 사용된다. 그의 수술은 빠르지 않았으나 매우 신중하고 정확하다는 평판을 얻었다.

3. 2. 갑상선 기능 저하증(크레틴병) 연구

'''갑상선(갈색)과 주변 조직''' 남성의 경우 목젖과 쇄골 사이에 위치한다. 그림 상단은 설골, 바로 아래에는 그림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갑상연골(목젖)이 있다. 갑상선 바로 위 회색 근육으로 그려진 위아래로 뻗어있는 근육이 갑상설골근, 갑상선 좌우로 위아래로 뻗어있는 하늘색 관은 내경정맥, 붉은 관은 총경동맥


코허가 갑상선 수술 연구를 시작했을 당시, 갑상선종(goiter) 치료는 주로 갑상선 절제술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매우 위험한 시술로 여겨졌다. 1872년 당시 갑상선 절제술의 사망률은 일부 추정치에 따르면 75%에 달했고, 프랑스 의학 아카데미에서는 이 수술을 금지하기도 했다. 코허는 소독 처리된 상처 관리, 출혈 최소화 등 현대적인 수술 기법과 특유의 신중하고 정확한 수술 방식을 적용하여 갑상선 절제술의 사망률을 크게 낮췄다. 이미 18%로 당시 기준으로는 낮았던 사망률을 1912년까지 0.5% 미만으로 줄이는 데 성공했다. 이 시기까지 코허는 5,000건 이상의 갑상선 절제술을 직접 시행했다. 코허의 수술법의 성공은 동시대 외과의사 테오도어 빌로스의 수술과 비교되기도 했는데, 윌리엄 스튜어트 할스테드는 코허의 방식을 높이 평가하며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해 여러 해 동안 숙고해 왔으며, 그 설명은 아마도 두 명의 저명한 외과 의사들의 수술 방법에 있을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코허는 깔끔하고 정확하며, 비교적 무혈적인 방식으로 수술을 하여, 캡슐 밖에는 거의 손상을 주지 않으면서 갑상선 전체를 세심하게 제거했다. 빌로스는 더 빠르게 수술했고, 내가 기억하기로는 조직에 대한 배려가 덜했고 출혈에 대한 우려도 적어 부갑상선을 쉽게 제거했거나, 적어도 그들의 혈액 공급을 방해했을 수 있으며, 갑상선 조각을 남겨두었을 것이다." (Halstead WS. The operative story of goitre. Johns Hopkins Hosp Rep 1919;19:71–257. – Quoted in Morris et al.)

그러나 코허와 다른 연구자들은 갑상선을 완전히 제거할 경우, 갑상선 호르몬 부족으로 인해 크레틴병(cretinism)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으며, 코허는 이를 '갑상선 절제 후 악액질'(cachexia strumiprivade)이라고 명명했다. 이 현상은 1874년 일반 개업의 아우구스트 페체린과 1882년 자크 루이 레베르댕 및 그의 조수 오귀스트 레베르댕에 의해 코허에게 보고되었다. 레베르댕은 1882년 9월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 위생 회의에서 코허를 만나 갑상선 완전 절제술의 위험성에 대한 우려를 전달했다. 이후 코허는 자신이 수술했던 환자 102명 중 77명을 추적 조사하여, 갑상선을 완전히 제거한 환자들에게서 신체적, 정신적 기능 저하 증상이 나타남을 확인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코허의 정교한 수술 능력 때문에 갑상선을 거의 완벽하게 제거할 수 있었고, 이는 오히려 크레틴병이라는 심각한 부작용을 명확히 드러내는 결과를 낳았다.

코허는 1883년 4월 4일 독일 외과학회 강연에서 갑상선의 완전 절제는 피해야 한다고 발표했으며, 같은 해 ''갑상선 절제술과 그 결과에 대하여''(Ueber Kropfexstirpation und ihre Folgende)라는 제목의 논문을 출판했다. 레베르댕은 이미 1882년 9월 13일에 관련 연구 결과를 발표했고 1883년에도 추가 논문을 발표했지만, 코허는 이 발견에 대한 레베르댕의 우선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코허의 발표에 대해 일부에서는 갑상선종과 크레틴병이 같은 질병의 다른 단계일 뿐이며, 코허가 보고한 증상은 수술과 무관하게 발생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코허와 레베르댕 등의 연구는 갑상선의 기능을 이해하고, 갑상선과 선천성 크레틴병 사이의 연관성을 밝히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이러한 발견은 이후 다양한 갑상선 관련 질환에 대한 갑상선 호르몬 대체 요법 개발의 기초를 마련했다.

3. 3. 신경외과 및 기타 분야 기여

코허는 신경학 및 신경외과 분야에도 크게 기여했다. 이 분야에서 그의 연구는 선구적이었으며, 뇌진탕, 신경외과, 두개내압(ICP) 분야를 다루었다. 또한 그는 간질과 척추 및 두개골 외상의 외과적 치료법을 연구했다. 일부 간질 환자에게 외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 뇌종양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으며, 간질이 두개내압 증가로 인해 발생한다고 가설을 세우고 뇌척수액 배출이 간질을 치료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일본인 외과 의사 이토 하야조는 1896년 베른에 와서 코허의 지도 아래 간질에 대한 실험 연구를 수행했다. 코허는 실험적으로 유발된 간질 동안의 두개내압 변화에 특히 관심이 있었고, 이토가 일본으로 돌아간 후 간질 환자에게 100회 이상의 수술을 수행했다. 미국 외과 의사 하비 쿠싱은 1900년 코허의 연구실에서 여러 달을 보내며 뇌 수술을 참관하고 수행했으며, 혈압두개내압의 관계를 설명하는 쿠싱 반사를 처음 접했다. 코허는 이후 감압 개두술이 두개내압을 낮추는 효과적인 방법임을 발견했다. 그의 수술 교과서 Chirurgische Operationslehrede에서는 1060페이지 중 141페이지를 신경계 수술에 할애하여 뇌의 탐색 및 감압 방법을 포함시켰다.

코허의 다른 주요 업적은 1870년 발표한 견갑 관절 치료에 관한 논문에서 시작된다. 그는 내분비 기관인 갑상선 종양 연구를 시작하여 해부학, 생리학, 병리학으로 연구 범위를 넓혔고 치료법 개발에 진전을 이루었다. 1876년 최초의 갑상선 완전 절제술에 성공했으나, 1883년에는 완전 절제가 크레틴병을 유발할 수 있음을 보고했다. 당시 갑상선은 주변에 혈관과 기관, 식도, 경동맥 등이 밀집해 있어 수술이 매우 어려운 부위였다.

1880년에는 "폐쇄성 외상에 대하여", 1882년에는 "외과 수술학"을 저술했다. 이후 내반족의 원인을 규명하고 치료법을 연구했으며, 급성 골수염, 총상 방부 처리, 담도 질환 치료, 뇌척수 생리 등 다양한 외과 분야를 탐구했다. 또한 설 절제술, 허리 관절 및 손목 관절 수술법을 개발했다.

견갑 관절 정복술 연구도 지속하여 그의 방법은 현재에도 코허법으로 불리며, 어깨 관절 탈구의 기본적인 정복술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또한, 최초의 인공 항문 수술에도 성공했다. 조지프 리스터의 무균 수술법을 스위스에 도입했으며, 갑상선 수술법을 지속적으로 개선하여 1912년까지 5000례에 달하는 수술을 집도하며 사망률을 기존 18%에서 0.5%까지 획기적으로 낮추는 데 성공했다.

코허는 수술 속도가 빠르거나 손놀림이 민첩한 외과 의사는 아니었지만, 매우 신중하게 수술을 진행하는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는 수술법 연구와 더불어 외과 기구 개선에도 힘썼는데, 톱니 모양 끝에 갈고리가 달린 코허 겸자와 존데는 그가 개발한 대표적인 기구로 현대 수술에서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3. 4. 수술 기구 및 수술법 개발

코허는 1870년 어깨 탈구를 치료하는 방법에 대한 연구를 발표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시술법은 기존 방법보다 덜 고통스럽고 안전했으며, 의사 혼자서도 시행할 수 있었다. 코허는 해부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이 방법을 개발했으며, 이는 현재에도 '''코허법'''(Kocher manoeuvre)으로 불리며 어깨 관절 탈구의 기본적인 치료법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같은 시기 코허는 총상과 그로 인한 골절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그는 1874년 "인류의 관점에서 본 탄환의 개선"이라는 강연과 1875년 "현대 전쟁용 소총 탄환의 폭발 효과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통해, 소구경 탄환이 덜 해롭고 더 느린 속도의 탄환 사용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코허는 조지프 리스터의 방부법(antiseptic method)을 스위스에 도입한 선구자 중 한 명이다. 리스터와 직접적인 교류 여부는 불분명하나 서신을 주고받았으며, 초창기부터 무균 기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동료들에게 전파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접근이었다. 1868년 병원 보고서에서 그는 사망률 감소가 리스터의 처치법 덕분이라고 밝혔고, 이후 병원장으로서 엄격한 무균법 준수를 강조했다. 코허는 모든 상처 감염의 원인을 철저히 규명하고 감염원을 제거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으며, 이를 위해 수술실 방문객 출입을 금지하기도 했다. 그는 무균 치료와 수술에 관한 여러 저서도 출판했다.

코허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갑상선 수술법 개발이다. 그는 갑상선종 연구를 해부학, 생리학, 병리학으로 확장하여 치료법을 개발했다. 갑상선은 기관, 식도, 경동맥 등 중요 기관과 혈관에 둘러싸여 있어 수술이 매우 어려운 부위였다. 코허는 1876년 최초의 갑상선 완전 절제술에 성공했지만, 1883년에는 이 수술이 크레틴병을 유발할 수 있음을 보고하기도 했다. 그는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갑상선 수술법을 개선했고, 1912년까지 약 5,000건의 갑상선 수술을 집도하며 안전한 수술법을 확립했다. 이를 통해 기존 18%에 달했던 갑상선 수술 사망률을 0.5% 미만으로 크게 낮추는 데 성공했다.

갑상선 외에도 다양한 외과 분야 연구에 기여했다. 골수염, 총상 치료, 담즙 관련 질환, 뇌척수액 생리 등을 연구했으며, 내반족(clubfoot)의 원인 규명과 치료법 개발에도 힘썼다. 또한 절제술, 고관절 및 손목 관절 수술법을 개발했으며, 최초의 인공항문 수술에도 성공했다. 1880년에는 "폐쇄성 외상에 대하여", 1882년에는 "외과 수술학"을 저술했다.

코허는 수술 기구 개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그가 개발한 '''코허 겸자'''(Kocher clamp)는 끝에 갈고리가 달린 톱니 모양의 지혈겸자로, 오늘날에도 수술 현장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10][11] 그는 탐침(probe, sonde)도 개발했다.

코허는 수술 속도가 빠르거나 손놀림이 민첩한 편은 아니었으나, 매우 신중하고 체계적으로 수술을 진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코허의 이름을 딴 수술 기법, 징후 등은 다음과 같다.

명칭설명
코허 집게지혈에 사용되는 톱니 모양의 날과 맞물리는 이빨이 있는 수술 도구[10][11]
코허 지점뇌실에서 뇌척수액 배출을 위한 카테터 삽입 시 일반적인 진입 지점[12]
코허 조작법후복막강 구조물을 노출시키는 수술 기법[13]
코허 절개담낭 절제술에 사용[15]
코허 절개 II갑상선 수술에 사용[15]
코허 징후갑상선 기능 항진증 및 그레이브스병에서 나타나는 눈꺼풀 현상[15]
코허-데브레-세멜라인 증후군영유아 갑상선 기능 저하증으로 근육 비대, 점액부종, 저신장, 크레틴병 등을 특징으로 함[14]


4. 수상 및 영예

코허는 갑상선 생리학 및 병리학 연구, 특히 갑상선종 치료법 개발에 대한 공로로 1909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다. 이는 임상 업적만으로 노벨상을 받은 드문 사례 중 하나로 평가된다. 그는 노벨상 상금을 베른에 코허 연구소를 설립하는 데 사용했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여러 수술 기구, 기법, 의학 용어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 '''기구 및 기법:''' 두개골 계측기, 코허 조작법, 코허 절개법, 코허 외과용 클램프 (1882년 발명) 등이 있다. 특히 코허 조작법은 오늘날에도 정형외과에서 표준적인 치료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 '''의학 용어:''' 코허-데브레-세멜라그네 증후군


그의 주요 저서인 Chirurgische Operationslehre|히루르기셰 오페라치온슬레레de (수술학 교과서[5])는 6판까지 출판되었고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외과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코허는 학계 및 의료계에서 다음과 같은 다양한 직책을 맡고 영예를 얻었다.

  • 1909년 노벨 생리학·의학상
  • 영국 왕립 외과대학 명예 회원(Honorary FRCS, 1900년 7월 25일)[16]
  • 베른 대학교 총장 (1878년, 1903년)
  • 베른 및 스위스 의사 협회 회장
  • 스위스 외과 학회 공동 설립 및 초대 회장 (1913년)
  • 독일 외과 학회 회장 (1902년)
  • 독일 외과 학회 명예 회원 (1902년)
  • 제1회 국제 외과 학술대회 의장 (1905년, 브뤼셀)
  • 이 외에도 다수의 명예 회원직과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5. 유산 및 영향



에밀 테오도어 코허는 갑상선암에 대한 외과 수술법 개발이라는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오늘날 사용되는 갑상선 절제 수술법을 고안했으며, 약 5,000건의 갑상선 수술을 집도하며 사망률을 기존의 18%에서 0.5%까지 획기적으로 낮추었다. 이러한 임상적 업적은 그에게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안겨주었으며, 순전히 임상 업적만으로 노벨상을 받은 거의 유일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갑상선 치료 연구는 초기에는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갑상선종 치료법 개발에 성공하여 많은 생명을 구했다. 1883년에는 갑상선 완전 절제술 후 크레틴병이 발생할 수 있음을 보고하기도 했다.

코허의 연구는 갑상선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지혈, 방부 처리, 외과적 감염 질환, 총상, 급성 골수염, 감돈 탈장 이론, 복부 수술 등 다양한 외과 분야에 걸쳐 중요한 기여를 했다. 1870년 발표한 견갑 관절 치료 논문을 시작으로, 1880년에는 "폐쇄성 외상에 대하여", 1882년에는 "외과 수술학"(''Chirurgische Operationslehre''[5])을 저술했다. 이 "외과 수술학"은 6판까지 출판되었고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외과 의사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내반족의 원인 규명 및 치료법 연구, 담도 질환 치료, 뇌척수 생리 탐구, 설 절제술, 허리 및 손목 관절 수술법 개발 등 다방면에 걸쳐 연구를 진행했다. 그가 개발한 어깨 관절 탈구 정복술은 현재까지도 '''코허법'''으로 불리며 기본적인 치료법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최초의 인공 항문 수술 성공 역시 그의 업적 중 하나이다. 조지프 리스터의 무균 수술법을 스위스에 도입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코허는 수술 기구 개발에도 힘썼다. 1882년 수술 중 출혈을 막기 위해 발명한 코허 외과용 클램프와, 톱니 모양 끝에 갈고리가 달린 '''코허 겸자'''는 현대 수술에서도 필수적인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이 외에도 존데 등을 개발했다. 그의 이름을 딴 많은 기구(두개골 계측기)와 수술 기법(코허 조작법, 코허 절개법), 그리고 코허-데브레-세멜라그네 증후군이 존재한다.

테오도어 코허의 흉상 (제작: 카를 헤니)


코허는 뛰어난 교육자로서도 명성이 높았다. 약 100학기 동안 베른 대학교에서 10,000명에 가까운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명확하고 논리적인 사고방식을 강조하며 학생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특히 당시 러시아에서 공부할 기회가 제한되었던 유대계 러시아 학생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가르쳤다. 이러한 러시아와의 인연으로 러시아 지리학회는 만주의 우준-촐동기(Ujun-Choldongi) 지역에 있는 화산에 그의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1904년 또는 1905년에는 25명 규모의 개인 클리닉 "울멘호프(Ulmenhof)"를 열어 주로 부유한 외국인 환자들을 치료했으며, 1913년에는 레닌의 아내 나데즈다 크룹스카야를 직접 수술하기도 했다.

코허는 생전에 249편의 논문과 책을 발표했으며, 130명 이상의 박사 과정 학생들을 지도했다. 그는 1878년1903년베른 대학교 총장을 역임했고, 베른 및 스위스 의사 협회 회장을 지냈으며, 1913년 스위스 외과 학회를 공동 설립하고 초대 회장을 맡았다. 그의 가르침을 받은 많은 제자들이 스위스를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의학 발전에 기여했다. 대표적인 제자들은 다음과 같다.

이름활동 지역/분야
카를 아렌트베른
오스카 베른하르트생모리츠
안드레아 크로티오하이오
구스타브 다르델베른
카를 가레
고틀리프와 막스 포이어장크트갈렌
안톤 포니오랑나우
발터 그뢰블리아르본
카를 카우프만취리히
알베르트 코허베른
요제프 코프루체른
에른스트 쿠머제네바
오토 란츠암스테르담
에드몽 라르디제네바
야콥 라우퍼인터라켄
알베르트 뤼티
헤르만 마티베른
샤를 페타벨뇌샤텔
파울 프플러올텐
프리츠 드 케르뱅라쇼드퐁/바젤/베른
아우구스트 릭리랑엔탈
에른스트 리벤인터라켄
아우구스트 롤리에레젱
세자르 루로잔
카를 슐러로르샤흐
프리츠 슈타인만베른
알베르트 포겔루체른
한스 빌드볼츠베른
하비 쿠싱미국 (신경외과)
이토 하야조 (1865–1929)일본
S. 베레조우스키러시아



코허가 받은 노벨상 상금은 베른에 코허 연구소를 설립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의 이름은 테오도어 코허 연구소, 코허가세(Kochergasse), 베른의 코허 공원(Kocherpark) 등에 남아 기려지고 있다. 인젤스피탈에는 1927년 카를 헤니가 제작한 코허의 흉상이 있으며, 코허 공원에는 막스 푸이터가 제작한 또 다른 흉상이 있다. 1950년 스위스 역사가 에드가르 봉주르 (1898–1991)는 코허의 삶에 대한 모노그래피를 출판했으며, 이는 1981년 증보판으로 다시 출간되었다.[6]

달의 코허 분화구(Kocher)[7]와 소행성 (2087) 코허[8] 역시 그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베른 대학교1915년부터 매년 모든 분야의 뛰어난 젊은 연구자에게 테오도어 코허상(Theodor Kocher Prize)을 수여하고 있다.[9] 1967년에는 스위스 우표에 그의 초상화가 사용되었다. 코허는 천재적인 외과의라기보다는 매우 신중하게 수술을 진행하는 의사로 평가받았으며, 그의 철저함과 끊임없는 연구는 외과학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참조

[1] 문서 While the dissertation was published in 1866 and the HLS refers to 1866 as date of promotion and 1865 as date of completing his studies, all other sources point to 1865 as the date where Kocher obtained his doctorate
[2] 문서 Choong (2009) claims that Kocher became assistant in Bern already in 1866 but according to Bonjour, Kocher was then still in Berlin
[3] 문서 Several alternative spellings to Marie Witschi-Courant exist, for example Maria Witschi (ref hls), Witchi (ref choong2009), Witchi-Cournant (ref tan2008), Maria Witschi but in letters "Marie" (ref: [http://katalog.burgerbib.ch/deskriptordetail.aspx?ID=137721 Descriptor]
[4] 문서 The Bernese Burgerbibliothek give 1850–1925 as her living years and also Bonjour 1981 writes (pg 86) that she was nineteen in 1869 but does not give a date of death
[5] 서적 Text-book of operative surgery https://archive.org/[...] London: Adam and Charles Black 2018-01-07
[6] 웹사이트 Bonjour, Edgar http://www.hls-dhs-d[...] 2018-01-07
[7] gpn Kocher
[8] 웹사이트 (2087) Kocher http://ssd.jpl.nasa.[...]
[9] 웹사이트 Theodor Kocher Prize https://www.unibe.ch[...] University of Bern
[10] 웹사이트 Medical Definition of KOCHER'S FORCEPS http://www.merriam-w[...] 2018-01-07
[11] 웹사이트 MEDICAL TECHNOLOGY – FROM CRAFTS TO HIGH-TECH https://www.swiss-me[...] 2022-05-10
[12] 웹사이트 Kocher's Point https://web.archive.[...] 2020-08-22
[13] 서적 Surgery of the Biliary Tract: Old Problems New Methods, Current Practice https://books.google[...] Springer Science & Business Media 2012-12-06
[14] 웹사이트 APA Dictionary of Psychology https://dictionary.a[...] 2020-08-22
[15] 웹사이트 Emil Theodor Kocher • Medical Eponym Library https://litfl.com/em[...] 2020-08-22
[16] 웹사이트 Kocher, Theodor – Biographical entry – Plarr's Lives of the Fellows Online http://livesonline.r[...] 2012-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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